우리가 선택한 돌봄의 언어 : ‘우리’와 ‘생명’, 그리고 요양원이 지키고 싶은 가치
- 선진요양원

- 2월 19일
- 4분 분량
최근 독서 회의에서 동료가 읽었던 책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개된 책 중에 하나가 이어령 작가의 ⌜스피치 스피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 권의 인문서로서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책 속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니 유독 마음에 오래 머무는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언어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그 질문의 끝에서 만난 ‘우리’와 ‘생명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개념은 책 속의 사유를 넘어,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요양원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돌봄이란, 우리가 선택한 언어의 온도로 어르신의 마지막 계절을 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 사유의 조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1.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머문다는 것.
한국어의 ‘우리’라는 단어가 가진 독특한 탄력성에 주목하는 부분이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서양의 ‘We’라는 단어가 독립된 개인들의 집합을 뜻한다면, 우리말의 ‘우리’는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 내가 머무는 울타리 같은 개념이라는 점으로 읽어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요양원에서 매일 사용하는 언어의 방향을 고민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르신은 돌봄의 대상으로, 종사자는 ‘서비스 제공자’로 너무 또렷하게 나누어 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 경계는 제도나 역할보다, 우리가 무심코 써온 말들 속에 먼저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향하고 싶은 돌봄의 언어는 어르신과 우리를 분리해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같은 울타리 안에 머물게 하는 말에 가까웠으면 합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집”이라는 표현 속에는 소유의 의미보다, 어르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공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짊어지겠다는 관계의 태도가 먼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께서 요양원에 입소하는 순간,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넓은 바다의 일원으로 다시 이름 붙여집니다. 우리가 어르신을 ‘우리’라고 부르기로 선택할 때, 요양원은 돌봄을 제공하는 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조용히 기대어 설 수 있는 생활공간으로 조금씩 확장해 나갑니다. 우리는 이곳이 어르신께서 지금의 모습으로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루의 속도를 함께 맞추고, 말 한마디와 시선 하나에도 “당신은 여기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라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돌봄의 태도를 가다듬고자 합니다.
2. ‘생명’이라는 시선: 사라짐이 아니라 깊어짐을 바라보다.

작가가 책에서 역설한 ‘생명자본주의’는 효율과 자본의 시대를 넘어 인간의 생명력 그 자체가 자산이 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세워보자는 제안에 가깝죠.
우리는 오랫동안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효율적인지, 얼마나 많은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중심으로 사람의 시간을 평가해 왔습니다. 그 기준 안에서는 느려지는 삶이나 멈춰 서는 시간은 쉽게 의미를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생명자본주의’라는 말은 바로 그 시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더 많이 해내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삶, 관계와 감정, 의미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상태를 다시 귀하게 바라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에서 바라볼 때, 어르신들의 시간은 더 이상 소모되는 과정이 아니라 삶이 가장 깊어지고 농익어 가는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줄어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오랜 세월을 통과하며 쌓인 경험과 기억, 삶의 무게와 결이 고요하게 응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르신의 깊은 주름을 마주하며 무엇을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것이 단지 지나온 시간의 흔적인지, 아니면 수십 년의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고유한 이야기인지 말입니다. 어르신께서 들려주시는 지난날의 이야기, 문득 건네는 미소 하나, 말없이 전해지는 눈빛 속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간을 귀 기울여 듣고, 그 존재를 존중하려 애쓸 때, 돌봄은 단순히 도움이 아니라 삶을 함께 마주하는 만남에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질병과 노화라는 그림자에 가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생명의 빛을 가능한 한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 그것이 우리가 ‘생명자본주의’라는 말에서 돌봄의 언어로 옮겨 담고 싶은 부분입니다.
어르신은 돌봄을 받는 존재이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깊이를 몸으로 보여주고 계신 하나의 고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공간에서 계속해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3. 가치를 지키는 언어: 마음에 닿는 말의 온도

작가는 사전에 정리된 말보다 삶의 현장에서 숨 쉬듯 건네지는 언어에 더 큰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문법적으로 완벽한 말이라도 그 말이 놓이는 자리에 온기가 없다면, 마음까지 닿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양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자주 마주합니다. 정해진 표현과 절차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르신의 하로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말에 사람의 마음이 실릴 여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양원에서 지키고 싶은 가치는 기록지에 적히는 정교한 수치가 아니라, 어르신의 눈동자에 맺히는 평온함에 더 가깝습니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라는 안내와 “어르신, 오늘 햇살이 참 고운데 우리 같이 식탁에 앉아볼까요?”라는 말 사이에는 같은 내용을 전하면서도 전혀 다른 온도가 흐릅니다. 그 한마디에는 어르신의 오늘을 하나의 삶으로 존중하려는 마음,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돌봄의 언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건네는 만들은 어르신의 하루를 받쳐드리는 기반이 됩니다. 그 말들 속에 ‘우리’라는 부름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시선이 담길 때, 요양원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문장 속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장면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맺으며, 우리가 가꾸어 가고 싶은 생명의 정원
작가의 사유를 따라가며, 요양원이라는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곳은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자리라기보다, 오랜 시간의 무게를 품은 삶이 ‘우리’리는 이름 아래 잠시 머무는 공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르신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하루를 하나의 고유한 삶으로 존중하려 애슬 때, 요양원은 기능을 수행하는 일터를 넘어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조용한 배움의 공간이 되어 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건네는 다정한 말 한마디, 잠시 멈춰 서서 함께 바라본 햇살 하나가 어르신의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같은 질문을 마음에 남겨둡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언어를 선택했는지, 그 언어는 누구의 하루에 어떤 온도로 닿았는지.
그 질문을 품음 채 다시 어르신들의 방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경건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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